2011년 9월 12일 월요일

여섯번째 [이시대 마지막 DJ를 만나다.]

안녕하세요 DJ 오민 입니다.
기사입력 2011-09-11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다운타운가에서 음악을 시작해서 13년 동안 목포MBC  별이 빛나는 밤에, 정오의 희망곡 ,굿모닝 FM  제작, 진행자  지금은 음악
카페에서 운영을 하면서 음악을 직업 삼아서 살고 있는  인간이 달에 최초로 갔었던 69년에 태어나 한국 나이로 43살 방송 나이로는
 40살  DJ 출신의 오민 입니다
 
 DJ이 DJ 추억을  말하다.
 
타운타운가에서 시작 할때는 환경이 열악 했었죠 그 당시 초보 DJ들이 월급이 거의 없었어요 기존 메인DJ의 수강생으로 들어가서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음악을 한곡 한곡씨 배워 가면서 세월이 지나가면서 정식 DJ가 되는데 그때가 지나온 세월 그때는 힘들
었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죠
 
월급이 당시 20년 전에 보조 경우 거의 월급이 없었고 2만원 3만원 정도 지급이 됬는데 당시 엘피가격이 2천원 정도 였으닌까 지금으로
따지면 한 20만원 정도 였죠  지금 제 기억으로는 메인디제이는 20년 정에는 50만원 60만원 이었는데  이게 이게 두시간 일을 하고 고액이
였죠 당시 공무원 본봉보다 많았으닌까요 저도 보조 시절에는 배고프고 그랬는데 월급만 타면 그걸 다 엘피사는 재미로 살았어요 그리고
몰래 하루 이틀 날이 생기면 청계천에 가서 엘피 라이센스(정품) 비싸고  못사거 부트랙이라고 해서 백판이 장단이 2백원 3백원 비싸건
5백원 이었죠  먼 거리를 가서 시간을 투자하서 돈을 모아서 엘피를 사는 기억이 나네요
 
DJ이의 보조에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음악을 체계적으로 알고 싶어서 들어온 뷰류가 있었고 아닌 경우는 멋있어서 여성팬들에게 인기가
많다보닌가 그래서 DJ를 하는 경우있었는데 후자는 빨리 포기가 되죠 빨리 늘지가 않고 잿밥에 관심이 많다 보닌가 그게 표출리 되는
거닌까
 
 그 당시 음악실에 4명 정도가 기본인데 적은 곳은 3명이고 더 많은 곳은 보조가 3면 2명 정도 였죠  그리고  메인 DJ에도 서열이  맨 위
에  메인DJ가  있고 그 다음에 한다음에 세컨DJ  서드DJ 보조 DJ이 한두명 있었는데 당시 손님이 많은 시간에 메인 DJ이가 두시간
정도  방송 시간을 정해서 운영을 했었고 보조들은 오프닝과 파이널 시간에 문을 열고 닫는 시간 손님 없을때 멘트도 연습하고 가장
외로웠던던 시절이죠 메인 DJ가 잔 심부를을 시키면 그게 법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거 그 때는 선배들이 험한 심부를을 시켜도 자신
을 아끼고사랑한하는 거고 기회라고 생각하고 보조 때는 더 열심하던 시절이었었죠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그만큼 자기가 얼마만큼노력 하느냐에 따라  자기 팬이있었고 자기 음악다방에 팬이생기고 팬이 많으면 많을 수록
이름이 알려주고 업주 들 한테 스카웃을 받았죠 그러면서 빨리 성장 하면서 메인으로 되고 그렇지 못하고 그런 시시가 있었고 같은 지역
에서 음악 활동을을 하면서도 계보가 있었는데 정치도 계보가 있고 파가 있었는데 디제이 역시 선배 유명한 선배에 따라서 누구 누구
계보, 파라고 불렸고 자기 음악스승을 아버지라고 표현을 했는데 지금은 추억들이 추억으로 남개되고 찾아 볼 수 없는 시점이죠
 
사라진 음악다방  
 
 
 
그땐 소녀 팬들이 많았는데 지금처럼 컴퓨터도 없고 즐길 거리가 없엇는데 음악다방에 와서 음악을 듣고 시집을 듣고 혼자와서
시집을 펴서 소녀 팬들 음악실 와서 뜨게질을 하고 있어서 음악을 신청을 듣고 그런 모습들이 머리속으로 그려도 따뜻하고 정감이
느껴지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고  변화가 많아요 조금전에도 말했지만 음악 다방에 들어가면 커피 한잔에
가격도 큰 변화죠 20년 에는 커피가 500원 700원 1000원 지금은 3천원 4천원 5천원 가격 변화도 있고 문화의 변화라는게 그때는
컴퓨터가 없고 집에 음악 시스템을 갖춘집에 거의 없었을 거에요  그래서 그때는 음악다방 DJ들이 들려주는 음악감상을 하고 듣고
싶은 노래를 들으려면 엘피도 소장하고 시스템도 좋은  음악감상실에 가야만이 들을 수 있는 시절 이었죠 지금은 컴퓨터로 원하는
음악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이 DJ를 경험 하려며는 예전에는 오디션을 보고 보조DJ 부터 시작 했는데 지금은
인터넷 방송을 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인이 DJ로 활 동 할 수 있다는게 큰 변화죠
 
  음악을 관심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그런 친구는  지금까지도 후배 몇몇은 음악을 하는 친구도 있구요 학교 선생님 항공사에 하는 친구
일반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도 있고 방송 디제이를 13년 다운타운 DJ도 13년 하고 그랫는데 방송 DJ 보다 더 어려운게 타운 타운가 DJ
같아요 방송디제이의 힘든것  벽보고 혼자서 그렇게 말하는게 힘든 부분이라고 말하지만 가장 힘든것 은 앞에 많은 사람들이 바라  보고
있는 청중 앞에서 라이브로 하는게 휠씬더 어려운거고 그때 방송 디제이들은 원고를 써서 했고 물론 원고 되지는 않지만요 타운타운 가
DJ들은 즉흥적이고 감각으로 소화하기 바로바로  신청곡이 들어오면 질문이 들어오면 응답을 해야 하기 때문에 타운타운 DJ가  어려운점
이죠
 
그때 DJ에게 그냥 일반 종이에 리퀘스트 페이퍼 적은게 아니라 이쁜 종이에 색연필로 12가지 형형색색 단장을 하고 그림을 그려서
시를 적어서 보낸 주신 팬들도 있고  선배들이나 후배 중에 팬과 디제이 중이 결혼 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았어요 그때는 그냥 뭐랄까
팬하고 DJ로 만나면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정도로 생각을 했는데 예상을깨고  끝가지 결혼에 골인을 해서 행복하시는 분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기억나는 여성팬이 있다면
 
기억나는 나는 여성팬 한 분만은 말을 못합니다. 지금도 연락이 되는 다른 여성팬들이 계시기에  뭐라고 하실까봐 말은 못하겠고
구지 꼽자면 기억나는 팬은 늘 올때마다 음반 한장씩 선물로 사온 저보다 나이가 많았더 누나 팬도 있었는데 지금도 그 팬이 주신 음반도
가지고 있구요 처음에는 대중성 있는 음반을 가지고 오셨고  어떻게 알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전문성있는 음반들을 공부를 해서 선물로  주시더라구요 늘 시를 적어서 메모지에 예쁘게 적어 서 앉아서 꾸미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자랑같지만 여성팬이 굉장히 많았어요  빨리 스카웃 되고 이것 저곳에서 몸이 두게 세게 라도  부족할 정도라도 바쁘게 지내는
시절이 있었는데 그만큼 팬들이 사랑을 해줬기 때문인데 그때는 팬들이 얼마나 순수 했냐면 겨울이 되면 되게 장갑이나 목돌이 모자
뜨게질로 직접해서 선물을 받았는데  한겨울이면 10개 정도 받았고 예전에는 종이학 접는게 유행이었는데 그래서 유리관에 넣어서
선물 하는 시절이있었는데 그때는 몇만마리 받아보고  한 사람에게 받는게 아니라 여러사람에게 받았던 기억이 나고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죠  저 보다 약간 위의 세대인데 조용필씨의 단발머리 가사 같은 그런 시대였죠 
 
 
이름이 본명 이신가요 ? 
 
디제이가 본명을 쓰는 사람을 드문데 당시에는  이름을 두자로 짓는게 유행이게 저도 오민 이란 이름이 예명인 본명처럼 되어버렸죠  이름이 자신을 알리는 수단이었고 이름이 이쁘면 좋죠  클럽가면 유명한 가수들의 이름을 도용을 해서 홍보하는데 그런 것 처럼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자신을 대변하는 이왕이면 예쁘고 부드러워 하잖아요 유명배우들이 지금도 하고 있듯이 그때는 그런 추세였죠  본명은 이미지
관리상 촌스러워서 공개 안합니다.(웃음)
 
 
추천음악
 
 
 많은 분들이 저에게 질문 하기를  음악하는  DJ이고  음악 전문가 이니 어떤 음악을 좋아 하시냐 물어 보면 가장 어려운 질문 이에요

음악은 분야와 장르에 따라서 좋아하는 음악이 다르기 때문에 음악은 폭 넗은 장르가 있기 때문에 적시 적시에 잘 골라서 음악을 풀어주고
듣는게 맛이라고 보거든요 음악이라는  요즘은 접근성이 좋잖아요  얼마든지 컴퓨터로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렇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은 넷상에서 얼마든지 좋은 음악을 선택 할 수 잇고 음악에 맛에 길들여 지면 디지털 보다는 아날로그 음악을 접해
보라고 권유 하고 싶어요 음악 한곡을 추천하기 보다는  음악 통 털어서 어떤 음악부터 시작하라 할 수 없지만 기초부터는 비틀지 엘비스
프레슬리 이런음악으로 시작하지만은  결국에는 째즈 클래식 국악 이런 쪽으로 깊이를 더해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맛 일 수 있습니다.

음악을 접했으때는 꼭 디지털 보다는 처음 에는 디지털로 접하기 보다는 나중에는 꼭 아날로그를 맛 보시라 음악에 느낌이나 따뜻한 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음악을 휠씬더 느낄 수 있고 정서적으로 정신건강 쪽으로 좋은 분야가 아날로그 때문에 그렇게 추천 해보고 싶습니다.
콘서트도 가고 대체적으로 음악 좋아 하는 후배들을 보면 너무 마니아 쪽으로 한 장르의 음악으로 치우치고 내가 아는 음악이  최고다
아티스트가 최고다 음악은 수백가지 장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장르와 아티스트가 최고 이다. 굉장히 그렇게 음악을 듣다보면
글세요 한분야 에서는 딱 지식이 싸일지 모르지만 세상에 우리나라에도 여러가지 성이 있고 우리는 쌀박을 먹고 살지만 세계에는 주식
으로 사는 음식으로 수 백가지가 있거든요 우리 것만 최고다 고집하기 보다는 상대도 존중하고 배려 하다 보며는 다양성을 인정하다보면
좀더 폭 넓은 세상을 경험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으로 곡은 가사 의미 때문에 프랭크 시나트라에 따라 마이웨이 좋아 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달라요 환경에 따라 듣는 음악이 있고
닐영 존파커 네킨콜 레드 제플레 루이 암스트롱 장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각 장르에 에서 최고의 실력을 스타들 이거든요 저는 누구를
좋아 하는게 중요하는게 아니라  다양 하게 음악을 섭렵하는게 중요 하다고 봐요 
 
 
고민 
 
 
 
제가 음악 외에도 관심이 가장 많은게 사진인데 사진 시작 한지간 7년 8년 되는게 사진 작가가 되는게 꿈이였죠 또 한쪽으로는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요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그 대신에 관심만 많았지 그 길을 걸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까 ? 생각해 보면 ....
사진 작가가 제가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씩 출사는를 나가느데 사진은 음악과 비슷 한게 할 수록 어려운게 
사진이고 지금도 열심히 어디론가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을 상상하는데요  아직 까지는 어떻게 됬을 것이라 상상 못하죠

지금은 전문 디제이가 살아지고 없기 때문에 음악은 계속 공부를 하되 다른 쪽으로는 커피바리스타에 대한 관심이 있어요  그쪽으로 연계
를 시켜서 예전처럼 디제이가 있는 커피숍 커피 전문점을 꿈구고 있어요 조만간에 그것은 실현이 될것 같아요 지역에 하려고 준비 중에
있는데  새로운 시도 이고 도전이기 때문에 제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즘에 큰 고민은 없는데 내가 나이 먹으서 음악을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직업이 뭘가 ? 그 고민인데  그 직업을 없으면 만들어 보자 가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좀전에 말씀드렸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음악감상 커피 전문점을 꿈꾸고 있는데 일에 대한 고민이죠 과연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가요 시대다 보닌까 가요가 팝보다 좋은 가요가 나오고 있고 우리 가요가 팝 보다 못한 점은 없습니다.

팝이 밀려있고 힙합이라는 상업적으로 한 장르쪽으로 치우여 있기 때문에 다양성을 함께 추구를 하면서 음악을 감상하는 팬 층들이 음악팬
들이 폭 넓을수 있게 예전 디제이들이 한 역활을 다시 할 수 잇는 직업이나 환경을 만들어 보는게 고민이에요
  
지금도 정말 실력은 있는 오랬동안 타운다운 가에서 DJ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는데 방송국에 입문을 못한 분들이 너무 많죠 사실 그런 DJ
들에게 기회를 주는 방송국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물론 인터넷으로 방송을 하지만 그래도 공중파에서  하면 좋겠다. 지금이라 도 지식을
 갖추고 있는 디제이들이 방송국에 자기 이름을 방송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문화가 형성되어야 우리 음악문화가 발전하는건데 요즘에는 오락위주 재미위주예능위주 가다보니 에프엠방송이 음악방송인데
음악은 빠지고 말만 많이 늘었죠 정말 잘 못 가는 거고 제 주변에서 제 시스템을 모르는 분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서 라디오를 들었는데
왜 짜증이다 방송국에서 모르는 것도 많아요 그게 대세게 그게 정말 재미 있어서 듣는다 착각 하는 부분도 있는데 

음악방송은 음악방송답게 전문성을 가지고 거기다 살짝 오락성을 가진다면 훨씬더 전문성이 가진인 오락성을 믹스한다면 기능면에서 향상
된 방송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집에 엘피가 2천 오백장 그것도 좋아하는 음악들로만 모았는데 씨도 천여장 모았는데
지금은 많이 정리를 하고 가게에 있는 정도 밖에 몇백장 뿐이 없습니다  엇그제 홍대앞 이나 서울을 뒤졌는데 청계천도 없고 혜화동 쪽
백화점 밑 지하상가에 엘피 판매점이 있는데 갖춘게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런 음반 가게가 있다는게 다행이다 생각이에요  요즘 다시 엘피
바람이 불어서 좋은것 같습니다. 

 
행복한 세상이란 (지금 삶이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나가 의식주 고민하지 않는 유토피아 세상이겠죠 그넫 현실은 그렇지 못하닌가 조금 더 낳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걱정하고
생각 하고 희생에서 봉사하고  그런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싶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보단 자신
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봉사 할줄 아는 참여 할 줄 아느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다. 세상에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게 못하게 너무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사람 육체적인 고통을 받는 사람
먹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 아프리카에서는 하루의 수백명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끼 식사 사백원 생명을 유지하는 어린이들도 우리나라의
음식물  에서 음식물로 버려지는 양이 돈으로 환산하면 몇조원이 되는데 세상은 분배에 대한 불 균형 이것들 때문에 어쩌면 그것들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 하거든요

물론 자본주의 세상에서 균등하게 배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고통 받는 사람을 생각 한다면 우리가 인식을 달리 한다면  훨씬더 세상은 행복해 질꺼라고 하거든요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그런 분들은 사실 절망을 해버리면 그 끈을 놓아 버리면 더 큰 절망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절망에서서도 끝까지 포기라는 선택해 버리면 더이상은 희망이 없지만 끝까지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면 희망을 가진다명
 분명히  행복한 세상 다가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힘들대 좋은 친구가 필요한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삶의  무게가 있어요 
 
곁에 있는  사람도 친구가 될수 있지만  좋은데 혼자 있고 있을때는 음악과 큰 도움을 주거든요 저도 음악치료사 과정을 배우고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데 자격증을 공부를 하면서 음악이 인간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클까 공부를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음악이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어마어마 에 크고 무궁무진 합니다.  잠재력은 큽니다. 힘들때 음악에 기대보는 것도 자기 좋아하는 음악에 관심을 갖고 위안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말고 누구나 행복한 세상을 위해서 누구나 웃는 그날 까지 모두가 희생하고 돕고
관심을 가지고 살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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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4일 일요일

다섯번째 [정은임] 추모사업회를 만나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 정은임 입니다.
기사입력 2011-09-04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어떠세요? 이런 문구를 보면요.  어쩐지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으세요?  이런 것보다 더 강하게 사람을 밀어내는 게 하지만 있습니다. 
바로 분위기죠.  누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큰 길 가에 커다란 문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화려한 백화점이나
호텔, 갤러리의  입구는 어쩐지 사람을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런 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한테는  분위기 자체가 출입금지 푯말이죠.

하지만요,
골목 안 어느 곳 엔가 숨어있어서  간판도 잘 안보이고 입구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작은 칼국수집,선술집에는 언제나, 누구나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습니다.  아직은 어둡고 쌀쌀하죠.  이 가을 골목길 누구나 쭈뼛거리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작지만 아주 편안한 문,
열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조그맣지만  따뜻한 간판 등도 켜놓고 있겠습니다.
 
 

간단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한때는 아나운서였고 그리고  영원히 영화인으로 살아가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  입니다.
저의 대한 소개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 일을 시작 하게 되셨나요 ?
 
 
 
그녀(누나 혹은 정은임)가 갑작스럽게 우리를 떠나던 날 개인적으로는 무덤덤 하더라구요 첫번째는 사실에 대한 회피 일 수도 있고
너무도 믿기지 않았던 일이라 받아 드릴 수 없었던 사건 이었죠  그렇게 그녀가 떠나고  그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죠 그러던 그해 겨울 아는 형님과 안국동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중 형님의 지인 아름다운가게에서근무 하시는던 분과 동승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형님께서 아름다운가게의  철학, 나눔과 그리고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은임 아나운서 팬들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 " 라는 행사를 추천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고 좀 더 알아보고  이 일을 시작하세 된 계기였죠
 
술에 이루어진 역사군요 (웃음) 술도 술이지만 반 년 정도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정은임님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이 꽤나 높은 편이라
 고 생각이 드네요 ~
 
아니요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저보다 누나를 더 좋아했던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의 소명 혹은 사명
때문이라고 생각 하구요 이 행사를 진행하면서 누나를 알았던 혹은 사랑하던 분들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정은임
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건 중학교 시절이라 정은임이라는 사람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95년 그녀가 방송을 떠나고 그녀의
방송 복귀를 위해 노력하던 분들도 있었구요 그리고 그녀가 떠난 후 그녀를 기억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녀를 더 열정적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내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았죠
 
그대에게 정은임 이란
 
 
 
이런 질문은 정석적 이면서도 난처한 질문 입니다. 뻔한 질문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의 선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쉽게 답하기 어렵지만  
그녀의 방송을 듣다가 보면 개인적은 느낌으로 그냥 누나 혹은 친한 선배 같다는 느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어느날 학교에서
여자친구에게 차여서 징징데고 있을 때 뒷통수를 확 때려주거나 엉덩이를 툭 쳐주면서 " 별일아니다 " " 지나가는 신기루 일 뿐이다"
말해 주면서 " 밥 사줄게 " 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럼 팬들에게  정은임이란  세상에서 정은임이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
 
곤란한 질문이지만 한번쯤은 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정은임은 한 사람에게는 자녀에고 또 한사람에게는 배우자이고 또한 사람에게는 어머니 이고 또 한명의 아나운서이고 또 한명의
영화광 이며 우리에게는 별 이었죠 하지만 최근에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투사로 집중되어  투영되는 모습이 가끔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정은임 이라는 그녀가 좌파적 인물이다. 투사다 라는 말은 그녀에 한 부분일 뿐이지 전체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그녀의 방송을 다시 들어 본다면 아시겠지만 그녀는 좌파라는 단어보다는 무언가를 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보다는 강자 보다는
약자의 편에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한 것 뿐 입니다.
 
정은임님은 좌파, 투사라는 아니다. 라는 말씀 인가요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른 말이고 차이점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녀가 사랑 한 것  두가지  누나를 크게 두개로 말 하면 mbc 아나운서와 영화 입니다. 누나는 방송에서 MBC 무척이나 좋아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물론 그녀 혼자서 입바른 소리를 한다고 해서 혼난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MBC와 아나운서를 사랑했습니다. 특히
사적인 자리에서는 동료 아나운서 들의 칭찬도 아끼지 않고 후배들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방송 이후로 후임
아나운서가 그 자리로 들어 왔을 때 많은 비난을 했는데 그녀는 팬들에게 자제를 요청하며 후임 아나운서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녀는 잘 알려진 영화 광 입니다. 유학중에도 영화를 보기 위해  새벽을 시간을 쪼개서 영화를 보고 시간을 할애 했습니다. 방송 중에도
 다른 이야기 에서는 매우 차분하고 정교한 어투로 말을 했지만 영화 이야기를 할 때면 정색, 진지, 즐거움이 묻어 나오는 말투로 늘 이야기
 를 했습니다. 정은임과  영화이야기를 따로 구분 하는건 팬들의 입장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입니다.
 
정은임의 본질적인  두가지와  세부적인 것 들 중에서 그녀를 가장 이슈화를 이끌어 낸 것이 방송중에 한 사회적 발언들 입니다. 그녀의
발언이 분명 하기 쉽지 않는 이야기고  그녀의 발언과 영화의프로그램과의 특성상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그녀는  꼭 해야 할 말 이라면
그자리에서  말을 했습니다. 그 것 때문에 그녀는 좌파다. 투사다. 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죠 저도 그런 그녀의 발언 누나의 말을 좋아
하지만 그 것이 누나의 전부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팬으로서 부담 스러운 입장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생각 입장에 따라서  그녀를 개인적
으로 사랑하는 방법 그녀를  기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할 입장은 아닙니다.
 
정은임과 당신의 에피소드는
 
 
재미있는게 있다면 04년  03년도에 있었던 누나와 관련되 이야기를 가 처음으로 사연을 올렸고 그리고 누나가 그 사연을 읽고 난 후
바로 다음 주 부터 방송 을 그만 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참 ~ 너무 하신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겨우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사연을 보내는 건데  그 사연을 읽고 방송종료 사실을 알리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더라구요
 
손석희씨가 시선집중 에서 영화이야기를 하면서 은임누나를 언급 하셨는데 손석희씨는 영화를 볼 때 우선 누나에게 물어보고 누나가
추천하지 않는 영화를 본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도 그런면이 강합니다. 이성친구가 있을 때도 저는 순수하게 영화를 보고 싶어서 극장을
혼자 가는 경우가 많아  혼난 적이 많았죠  그리고 친구들에게 추천영화를 소개하면 친구들은 늘 상 " 왜 이상한 영화만 추천 하냐 " 라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정은임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에게 한말씀 전해 주세요
 
 
 
7년간 누나를 기억하는 행사를 하면서 누나가 참 부러웠습니다.  정은임 이라는 사람 참 대단한 사람 이구나 그리 유명한 아나운서는
아니였지만 그리 알려진 영화광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 이야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제가 지금
죽으면 가족과 친구들이 전부겠지만 누나는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참 존경스런 부분도 있습니다.
 
7년이 지난 시간에도 누나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드립니다. 그 시간이 슬픔이고 아직까지도 마음속에서 상처로 남아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달라 그녀를 기억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녀를
누나를 여전히 잊지않고  기억해 주셨어 고맙습니다. 내년에는 올해처럼 지지부진 한 행사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 할 것이며 영화 러브액
추어리 처럼 좀 더 밝은 모습의  누나를 기억하는 행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 그외 영화 이야기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한 말씀
 
 
 영화를 본다는 개념이 10년은 조금 넘은 것 같고 처음 영화를 순수하게 접한 지가 20년은 시점인데 아직도 영화는 잘 모르겠습니다.
화성에사는 관객과 금성에사는 영화가 지구에서 만난 것 처럼 영화는 늘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남여 관계와 같은게 영화 같습니다.
이 정도 보면 영화를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영화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주성치의 서유기 시리즈 입니다. 이 영화는 10대 후반에 볼 때와 30대 초반에 볼 때가 느낌이 굉장히 다릅니다.
서유기 시리즈는 아주 젊은 시절에 본다면 재미있고 웃기고 낭만적 스토리라면 시간이 조금 흐른뒤에  인생의 교과서처럼 모든걸 알고
경험하고  본다면 슬프고 매우 가슴아픈 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의 번뇌에 고뇌하며 자기 몸을 희생하며 제자를 살리려는 삼장의
마음과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는 손오공의 마음은 소주 한잔이 간절히 생각나는 나이가 된다면 이해 할 거라고 생각 합니다.
그외 추천 영화로는 없습니다. 구지 영화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양한 영화를 추천해 보고 싶습니다. 영화가  데이트의 목적이나
시간 때우기가 아닌 자신의 한부분이 될 때 쯤이라면 그에 맞는 영화를 찾아서 본다면 좋을 것라고 생각 합니다.  불법 다운 로드보다는
굿 다운로더도 있으니 합법적으로 다운로드 받으셔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다운로드 수익도 공정하게 배분 되야 한다는 의견도
피력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살아가기는 피곤하고 그냥 잠만 자고 싶은 시절이지만 " 권위는 용기를 잃지 않는자에게 온다" 라는 어떤 영화의 대사처럼
늘 용기를 잊지 말고 삶을 살아 가시면 좋겠습니다.
 
정은임추모사업회에서 알립니다.
 
2006년 부터 2009년 바자회까지 묵묵히 꾸준하게  활동해 주셨고, 그리고  플랭카드 디자인, 엑스배너  제작등등 기타 신경써야 할 
 여러가지 분야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김윤삼(오래된미래)님 2010년 바자회 무렵에는 건강때문에 직장도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병인지, 병세가 어떠한지는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메일도 열어보지 않으시고
휴대전화도 연락이 안되던데 혹시 이글을 직접 보신다면, 아니면 근황을 아시는 분이라면 이글에 간단한 소식 부탁드립니다.
 
 

2011년 9월 2일 금요일

세종은 정말 행복한 왕일까 ?

세종은 그 누구보다 불행한 왕이다. 
기사입력 2012-11-27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세종은 일반 역사적 평가와는 달리 가장 불행한 왕 일지도 모른다.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조선을 건국하며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그의 아들인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정권을 잡았고 2차 왕자의 난으로 왕좌에 오른다. 중요한건 이 모든 사실을 세종은 지켜봐야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위험에 처해 있었다. 태조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말 그대로 도박이었고 이어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역시
사전에 발각 되었다면 세종 역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종이 왕이 된 다음에도 세종은 행복한 일상을
보내지 못한다. 도저히 인간으로 보기 힘든 장면들을 목격 한다.  할아버지인 이성계의 가택연금 상태와 큰아버지인 정종의 비굴한 삶
외삼촌들의 쇠락을 보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기란 힘들었다. 그 결과 세종의 큰형인 양녕 역시 궁궐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도피하듯
궁을 빠져 나갔다. 과연 그런 모습을 본 세종은 행복 했을까 ?
 
 
 
세종 이후의 삶 역시 평탄하지 못했다.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의 피를 그대로 이어 받은듯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았다.  태종은 정도전을
죽였고 세조는 김종서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세종을 중심으로 아버지도 쿠데타를 아들도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잡은 아주 비참한
현실을 겪에 된다. 즉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 손에  죽었으며 자신의 아들과 손자 역시 자신의 아들손에 죽었다
 
과연 세종은 행복한가. 아이러니 한 사실은 세종의 업적은 태종과 세조의 역활이 크다. 이성계는 현 시대처럼 왕권과 신하들의 권리를
어느정도는 존중을 했다. 하지만 태종은 그러하지 않았다. 왕과 측근정치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세조 역시 비슷한 형태였다.
그 덕분에 태종이 만들어 논 왕권 중심에서 세종은 신하들과 불편함 없이 정치를 행햐였고 이후에도 아들 세조가 세종대왕의 치적을
높이는 일을 한 덕분에 지금의 세종대왕은 더 존경받는 왕이 되었다.
 
과연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 세종은 과연 행복한 왕이 된것 일까 ?
 
 

2011년 9월 1일 목요일

패륜의 상징 SK스포츠구단 과연 언제까지 스포츠 팬들을 우롱 할 것인가

SK 스포츠는 페륜이다. 
기사입력 2012-11-27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김성근감독의 경질사건으로 야구판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과연 SK스포츠 구단은 무엇을 위하여 스포츠를 운영하는지 이해
할 수
없는 아마추어 스포츠구단이다.  비단 이번 김성근감독 경질 사건뿐이 아니라 SK는 역사적인 면에서 스포츠행정이 저질,
폐륜, 폐악이라는
공식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2006년 전격적으로 SK그룹은  부천SK를 제주FC로 연고이전을 감행한다. 이 전부터 떠도는 소문은 있었으나 팬들이 구단에
항의를 하자 절대 그런일이 없을 것 이라고 말을 한 다음날 부천SK는 제주FC로 이사를 했다.  단 하루 만에 말을 뒤집는 비 상식적
인 행위를 한 것이다.

천안 일화의 경우 환경적인 요건에서 천안에서 성남으로 간 것이고  북패와 남패는 팬들을 조롱하는 모양세를 취하며 연고이전을 한 경우다.  서울FC 의 경우 긴 여정을 옮긴 경우라면 SK는 극도로 팬들을 조롱하며 옮긴 첫번째 사례이며 SK스포츠 구단의 비 윤리적인 사례의 시작이다.

참조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25915



 


 

SK스포츠 구단의 폐륜의 사례는 비단 축구뿐만 아니라  E-스포츠 에서도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주훈감독이 이끄는  SKT는
당대 최고의 E-스포츠 구단으로 오버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야구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기록과 비교에 견줄 수 있는 연속
우승을 이끌었던 감독이었다. 하지만 구단의 조급증은 주훈 감독을 궁지로 몰았으며 제대로 된 선수보강도 없이 감독과 선수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오버 트리플 이후 SKT가 긴장감이 풀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삼성이나 MBC 같은 팀들이 선수들을 영입하거나 육성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얻은 당연한 결과 였다. 하지만 SKT는  씨앗도 뿌리지 않고 결실을 걷으려는 비 윤리적인 모습을 취했다. 결국 연패를
거듭하던 주훈감독은 2008년 어느날 "그만 하라"는 구단의 통보를 받고 SKT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온게임넷에서 해설을 하면서
재기를 노리는 듯 했지만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

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513210.htm?imgPath=life/esports/2008/0123/




 

SK 폐륜의 결정을 보여준 김성근감독의 경질 " 그만 두셔야 겠습니다." 라는 단 한마디로  감독 재임기간 우승 3회
준우승 1회라는 야신을  야구장에서 내동댕이 쳐서  야인을 만들었다.  물론 김성근감독의 야구사랑만큼 이나 프론트와
불화에 대해서 김성근감독의 잘못도 인정되지만  원칙도 없고 기본도 없는 SK프론트는 한심하게 짝이 없다.  야구판에서
기본적으로 감독과 재계약을 하려면 올스타전 이전에 감독에게 어느정도 언질을 하게 되어 있지만 이번 경우 SK프론트는
할 수도 있는데 연말에 가봐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아리송한 말로 야신과 SK 야구팬들을 농락했다.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8240235


과연 SK스포츠 구단은 프로구단인가 아니면 아마추어구단인가 정말 궁금하다. 비상식적인 행위들이 SK스포츠 구단 전체적으로
보여지는 안타까운 모습은 과연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 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타 구단 타 스포츠 단을 조사한 결과 SK 보다는 못하지만 비 윤리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팬들을 무시하고 스포츠를 조롱하는
지금의 대한민국 스포츠는 어떻한 형태로 발전해야 하며 어떻게 팬들이 나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 기사에서 북패와 남패를 언급한 사항은 SK 구단을 비판할 의도로 작성하였습니다. 서울FC 와 제주FC 팬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