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1일 수요일

민주당은 SHOW와 퍼포먼스를 버리고 정책을 만들어라

지난 두번의 서울시장 선거를 돌아보자.   
기사입력 2012-11-27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2006년 2010년 두번의 서울시장 선거는 사실상 민주당(열린우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2006년에는 현실적인 패배로 강금실 후보가 패배
하였으며 여론의 흐름에 민감한 수도권 선거구에서  2010년에는 한명숙후보는 그런 여론의 힘을 받았지만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 한건
사실상 심각한 패배라고 받아 드려야 한다.

과연 그럼 민주당(열린우리당)의 서울시장 패배원인은 무엇인가 ?

역대 서울시장 후보는  한나라당의 텃밭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민주당에서 당선된 서울시장 조순씨는 끝내 한나라당으로 이직을 한
사례를 보았을 때 서울시와 민주당의 인연은 없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흐름은 강남불패나 경제발전 이라는
거대한 괴물 때문에 민주당이 패 했을까 ? 아니다. 그런 원인이 일정부분 작용하겠지만  지난 두번의 지방선거를 통해 본 민주당의
전략은 3류 정치에나 사용 될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2006년 2010년 강금실, 한명숙 후보는 적절한 후보검증을 거치기 보다는 그냥 흐름에 맞기려는 자세를 보여왔다. 실제로 2006년 선거때
민주당 자체 후보 경선에서는 최악의 투표율이 나왔으며 이 마져도 제대로 된 투표라고 볼 수도 없었다. 2010년도 마찬가지다. 한명숙
후보는 총선패배 이후 서울시장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냥 흐름을 보고 노풍을 업고 그냥 선거전에 뛰어 들었다.

그렇다면 강금실, 한명숙 두 후보를 상대한 오세훈 전 시장은 어떻게 준비 했을까 ?  강남 도련님 오세훈 시장은 17대 총선에 포기
선을 을 했다. 이 점을 비교 했을 때 강금실, 한명숙 두 명의 후보는 그 초점과 준비상태를 보더라도 오세훈 전 시장에게 밀린다.
오세훈 전 시장은 17대 총선을 포기하고 바로 서울시장 공략에 들어갔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군 이었던 맹형규, 홍준표 의원보다
더 치밀한 준비를 했으며 그 결과도 좋았다. 본선에서도 마찬가지다. 강금실 후보는 당시 대세라는 이름으로 서울시장 후보에
무상으로 등극했다.  한명숙 후보도 마찬가지다. 당시 서울시장이며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오세훈에 비해 한명숙 후보는 그 어떤것도
준비 하지 않았으며 급조된 공약이 대부분 이었고 그 마져도 민주당의 공약이었으며 심지어는 그 공약 보다는 정권비판에 열을
올렸다. 객관적으로 준비된 서울시장을 찍을 것인지 아니면 여론만 몰이하는 시장후보를 찍을 것 인지 판단에 대해서 서울시민들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강금실, 한명숙이 아닌 다른 후보였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을까 ?



만약 그 당시 민주당에서 강금실, 한명숙 후보가 아닌 이계안을 후보로 만들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 2006년 에는 오세훈이
승리가 확실 했다고 본다면 2010년 지방선거에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2006년에는 이미 이명박서울시장의 청계천 프리미엄과
열린우리당의 총체적 부실로 인해서 준비된 오세훈후보의 당선이 확실했다. 하지만 2010년에는 달랐을 것이다. 이계안 후보는 일관성
있게 서울시장직을 공략했으며 이미 그에 대한 과제도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2010년 노풍이라는 흐름을 타고 준비된 이계안이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되었다면 한명숙후보 보다 더 많은 득표를 했었을 것이고 오세훈 당시 시장을 넘어 서서 서울시장에 당선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결과론적인 이야기 이나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사안 이다.

민주당은 삽질을 멈추어라

정치가 우리 국민들의 좋은 술 안주라고는 하지만 국민의 대표성을 가진자 들이기에 비판을 자제 하려는 편이지만 이번 서울시장 재보선은
참으로 우리 정치가 아직도 3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순 무상급식 때문에 서울시장이 사퇴하고 그 전에 그 정책을 통과를 위해
시장직을 걸라는 야당의 민망한 발언들은 매우 유치하다. 물론 오세훈 전 시장의 대선포기 발언 역시 저질 코메디 이다.

민주당은 먼저 삽질을 멈추어야 한다. 민주당은 늘 이명박대통령에게 삽질을 멈추라고 말하지만 사실 삽질을 멈추어야 할 건 서민정당
이라는 거짓말을 하면서 삽질을 하는 민주당이 먼저 그만 둬야 할 것이다.


작년  은평을  재보선 선거 때 민주당은 오만한 삽질을 했다. 최고의 상황인 민주당연합은 최악의 상황 이었던 이재오에게 지역구 한곳을
헌납한 결과 였다. 과연 그 당시 민주당 후보로 장상후보가 적절 했는가 ? 그것도 야당통합 후보로 장상 후보는 적합한 인물 이었는지
고민 한번 하지 않고 장상 후보를 밀었다가 이재오후보에게 패배 했다.

장상후보가 민주당 후보로 나왔을 때 부터 이미 여론은 민주당에게 등을 돌렸다. 은평을 주민들은 이재오 대항마가 아닌 은평을 의
일꾼을 뽑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 점을 간과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승리로 오만한 민주당은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여론을 자기들 편이라는 무례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리고 마지막 상황에서도 다른 야당과 협상 관계에서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실질적으로 장상 후보가 뒤지고 있는 상황을 감지 했다면  국민참여당이나 창조한국당에 양보를 한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에 대한 현실적인 결과로 2011년 재보선 선거에서 그 결과가 똑똑하게 보여진다. 삽질하지
않은 최문순 후보는 삽질을 하던 엄기영 후보를 이겼고 순천에서 민노당에 양보한 부분에서 그 적절한 결과를 얻었다. 다만 오만한
국민참여당의 독선으로 실패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 두번의 결과에서 보여지는 건 단순한 당선이 아닌 201년 총선에 대한 국민
여론이 담겨있다.

민주당의 재보선, 총선, 대선 준비자세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퍼포먼스의 대표 천정배도 아니고 준비되지 않은 한명숙도 아닌 늘 서울시장직을 고수하는 이계안을
후보로 내세워라 그것이야 말로 국민을 기만하지 않고 진심어린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의 행위이다.

민주당은 과반이 되지도 말 것이며  다수당이 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서울지역에서 출마하는 후보 군들은 이미 김치국을
마시며 내심 다수당 복귀와 서울에서 과반을 얻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정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당장
민주당 깃발을 찢어 버려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은 양보이다. 민노당, 참여당, 한국당 같은 군소 정당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지원 유세를 해라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되어도 상관없다. 한나라당이 120석을 차지하고 민주당외 야당 연합이
190석을 가지게 된다면 그 것이 야 말로 승리다. 현실적으로도 지켜봐야 한다. 지금 지역 정치는 변화하고 있다. 특히 지방 민심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민주당 경선을 불복해서 탈탕하고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출마한 박지원의원의 영향으로 내년 총선에서
박지원의원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원내대표까지 지냈지만 지난 4월 총선에서도 보았듯이 전남 민심도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잘하는 사람을 뽑으려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은 배려와 양보 속에서 야당의 압승을  만들어
내는 것이 민주당의 할 일이다.

만약 민주당이 총선에서 다른야당에게 양보를 한다면 대선에서 승리는 확실로 정해진다. 하지만 총선에서 독선과 독단으로 일관
한다면 시민들은 야당의 분열로 판단하고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 갈 것이다. 그리고 또한명의 중요 한 사실이 있다면 박지원의원은
총선 포기를 하고 킹메이커로 나서야 한다.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가장 꺼려하는 인물이라면 박지원의원 일 것이다. 장관, 비서실장,
현 국회의원까지 하고 있는 박지원의원에게 청와대는  몇번이나 날카로운 지적을 당했다. 특히 대 정부 보고받는 자리에서 박지원의원
은 장관들에게 " 그렇게 해서 대통령을 잘 보필 하겠는가 " 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거부하지 못할 말을 하며 장관들을 질책했다.


 

박지원의원은 민주당의원들 중에서 도지사, 광역시장직을 하지 않는 것 만 빼고 국가  요직중의 요직은 거의다 경험했다. 그런 박지원은
내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대선에서 킹 메이커 역활을 해야 한다. 박지원 스스로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을
민주당과 빅지원의원은 지켜야 한다. 지금 민주당에서는 누군가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대선에서 승리를 하는 것이 최 우선 과제이다.

총선에서 다른 야당들에게 양보를 한 다는 것은 작은 손해 이지민 대선을 생각 한다면 야당들에게 지역구를 배려하고 대선에서 잘 연합
된 모습을 지지자들에게 보인다면 지난번 대선 같은 최악의 지지율, 투표율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여 더 이상의 삽질을 멈추고  반성하며 희생해서 스스로를 구원하기를 바란다.

2011년 8월 28일 일요일

네번째 인터뷰 [장애는 나에게 신의 주신 선물이다.]

전 지금의 제가 너무나도 좋습니다.
기사입력 2011-08-28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나는 김정훈 이다. 

 

 안녕하세요 30대 초반의  김정훈 이라고 합니다.  고향은 전남 완도에서  뱃길로 40분 정도 걸리는  소안면 입니다.  저는 어릴 적 부터
바닷가에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이곳에서는 살기 싫다. 도시를 열망해서 지금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서 장애인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건강할 때의 저는 주관도 없고 소신도 없는 비굴한 모습이었으나 사고 후로는 정신체계의 변화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 드린 다른 사람이란 것은 외적인 모습보다는 내면적인 것이 더 큰데 건강 할 때의 제가 열망하던 모습으로 변모를
했습니다.   전 지금의 제가 너무나도  좋습니다.

 본인이 잘하는 것 좋아 하는 것 

 
지금의 좋아 하는는 것은 건강 할 때 의 것 보다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때는 육체를 가누는 것은 어느정도는 됐으나 사고 후로는
플라토닉 처럼 정신적인 것에 더 많은 치중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전혀 보지 않었으나 사고 후로는 활자 중독이 되어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되고  책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노래는 건강 할 때도 잘 했었지만 사고 후로는 타고난 고음으로 인해
어디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 실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렵지만  장애를 가지게 된 과정을 어렵지만  말씀해  주세요

 
 1999년 4월 19일 군대 훈련소에 입대를 하고 경기도 남양주 1101 야전  공병단 133대대에  입대를 해서 열심히 군생활을 하던중
일병 정기 휴가를 받아서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같은 마을 친구 역시 군에서 휴가를 나와 같은 동병상련의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오토바이를 너무도 좋아하던 저는 만취된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게 된 결과로 인해 지금은 왼족 수족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건강 할때의 꿈은 이것 저것 많았으나 장애를 입은 후로는 꿈을 선택하는 폭도 너무나도 좁아 지더군요

그렇게 사고 나서 45일 동안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서  부모님의 애를 태우며 보내다... 극적으로 깨어 났지만 그 때의 저는
더이상 제가 알던 제가 아니었습니다. 죽마고우 친구와 술잔 기우리던중 친구가 제가 그런말을 하더군요

"   정훈아 ~ 너 사고 나더니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구나 "

그때의 저는  변화의 농도가 그리 짙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바뀐 정신체계는 더 이상 저를 기존의 저완 다르게 새로운
인격체로 변화 시키더 군요



지금의 이 길(직업,삶의 방향)이 고민에 대해서



지금의 관심사는 제가 장애 초반에는 제 모습이  온전한 상태라 생각을 했었고(물론 전혀 맞는 얘긴 아니지만..ㅜㅜ)
그 연유로 인해 저는 정상적인 사람과도 인연이 될 수 있다고 자부를 했었지만  그건 어디 까지나
저의 짧은 생각 이더군요 ~ 시간이 점차 지날 수록 제가 점점 초라해 지고 작아지는 위치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건강 할 때의 저는 애 늙은이였으나 사고 후로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젊은 측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모두 마음에 작용 같습니다. 초반에는 장애를 받아 들이는게 너무 힘들었으나 지금은 장애를 너무 고마워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 할 때를 회상해 보면 장애를 입은 사람중에 인생의 성공을 맛보는 사람들의 인터뷸 접해 보면 장애가 축복이라고 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저도 그와 흡사 비슷한 대로를 걷는 중이라 생각을 합니다.

지금의 장애는 저에게 축복입니다.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인생을 살라고 주신 축복 입니다.


  
지금까지 삶 중에 최고의 순간은

45일 동안을 생사의 기로에서 헤메던 중 상태 회복의 기미가 보이던 중에 콧줄이 갑갑해서 무의식 중으로 손으로 뻤쳐 뺏던것 같습니다.
그때의 저는 칠흑 같은 암흑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군의관들이 콧줄을 강제로  넣었던
기억이 생각 납니다.

희미한 의식속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지금 생각해 보면 성경에서 나오던 지옥을 연상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고통을 겪어서
지금은 신앙에 깊이가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예전과 다르게 하나님 아버지에게 더 의지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경험을 지옥이라고 생각되니 어떤 악재 속에서도 그것을 헤쳐 나가려는 용기가 생기더군요.

그때의 경험이 지금은 많은 삶의  거름으로 작용하다보니 지금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쉽게 굴하지 않고 이겨 낼수 있는 자신감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당신의 모습은  그리고 계획 당신의 미래  모습은

저는 예전부터 접했었던 건축설계 디자인 을 통해 자아 실현을 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고 앞으로 장애가 있지만  저랑
비슷한 처지에 있고  신앙이 있는 그런 아름다운 여인과 남은 여생을 꾸리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 그런 여인이 있기 있습니다. 그 여인과  맺어 질 수 있도록 기도 해 주세요



당신의 개인적인으로 꿈꾸는 것

저의 꿈은 천국으로 가는 것 입니다.


 고마웠던 사람, 미워했던 사람, 화해하고 싶은 사람
  어머니가 가장 생각 납니다.

 

제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메던중 어머니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물론 아버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아버진 48세의 나이로 돌아
가셨습니다.) 고생의 농도를 보면 아버지보단 어머니께서 훨씬 더 짙었습니다. 뇌를 다친 사람들은 깨어난 후 부턴 다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성격도 이상해 집니다. 그 이상한 성격으로 어머니께 모질 게 대했던 적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물론 어머니보단 그 입장에
처해있있던 제가 훨씬 더 힘들었겠지요. 그러나 제가 느끼는 고통은 저의 자처로 인해 불러들인 옳지 못한 상황이었지만..어머니께서
겪으신 그 고생은 순전히 저의 잘못으로 인해 불러들인 것이니..죄송할 뿐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언젠가는 어머니께서 죄송스러
웠다는 말씀을 드리니..백만불짜리 미솔 지으시며..."네가 일부러 그랬겟니..이 어민 다 이해한단다." 콧잔등이 시큼해지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당신이 꿈꾸는 행복한 세상이란  


제가 꿈꾸는 행복한 세상이란 주님께서 임재하시어서 세계만방을 다스리시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죽기 전에 이룰 수
 있겠죠?? ㅋㅋ

  이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









욥기 8장 7절 말씀인 "네 비록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은 사고 전에도 많이 보았으나 사고 후로는
느끼는 자각의 깊이가 훨씬 더 큽니다. 제 시작은 어차피 사고 전에서 부터 시작할 수 없습니다. 전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많은 성취를 이룬 후 꼭 여러분들께 돌아와서 이곳에 기쁜 소식 전하는 멋진 사람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머릿속에 있는 말씀은 많으나 지금은 이 말씀이 떠오르는군욥 ㅋㅋ
 
 

2011년 8월 21일 일요일

세번째 인터뷰 국민요정 [ 나 소리하는 여자야 ~] 만나다.

락커의 피가 흐르는 소리꾼 희우 입니다. 기사입력 2011-08-22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1.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는 그저 행복하게 노래하며 살고싶은 사람이예요
대전에서 태어났고 제 나이는 20대 ? 30대?.. 전 소중하니까 정확한 나이는 노 코멘트할게요^^* 어린시절을 여수에서 고등학교까지
보냈어요.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어떤 학교 인지도 모르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술고등학교  출신도 아니고, 지방이라
한예종이 어떤 학교인지는 잘 모르고, 그저 국립대라 등록금이 저렴하고, 합격된 후 다른 학교 시험보기 귀찮아서 들어 갔습니다. 

참, 유명한  이선균씨는 유명해지기 전에 학교 앞 술자리에서 한번 본적 있습니다. 뭐, 학교 때문에 서울에 올라 오기는 했지만 작은
항구 도시인, 여수에서 자란 환경 때문인지 사람많은 서울도시가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싶습니다. 소속된 단체는  없으며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고기사> http://star.mk.co.kr/new/view.php?mc=ST&no=287313&year=2011



2. 본인이 잘하는 것 좋아 하는 것 

 

특별히 잘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은 없구요.  그냥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노래 하는거 입니다.

5살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9살때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국악동요를 접하게 되었고  그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혼자 집에 오면 책상을 두들겨가며 부르던 기억이 나요. 지금도 생생이 기억나요. 동요와 달리  국악은 착착 감기는 '감칠맛'이 좋아서 가야금병창부터 배우게 되었어요. 그래서 장구도 사고 가야금도 사고 그랬고. 그러다 더 깊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판소리를 시작했습니다.  10살때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하게 되었네요.


 티비는 딱히 보는게 없고 드라마도 별로 안보고요. 음악 외에 좋아하는 게 별로 생각나는게 없는데요.. 아! 나는가수다 요새 즐겨봤어요.
임재범 너무 멋있어요!  사실은 제가 판소리를 하면서도  락음악에 많이 심취해잇었는데. 처음에는 김종서 노래를 듣다가 시나위를 듣게
됐고, 무척 좋아했죠. 그 당시 임재범있던 초기 시나위  음반부터 다 있을 정도로요.  여고를 다녔는데, 스쿨밴드에서 보컬로 공연도
했었어요. 특히 외국락도 좋아했지만, 인디락 좋아했고요. 여수에서 Our nation 인가? 초기 크라잉넛 인디 음반 나올때인데, 그것도
사서 듣고 그러면서 대학가서 락음악을 하겠다는 꿈도 키웠었네요. 


또 좋아하는 게 있다면.. 이외수 선생님 책을 무척 좋아하는데요. 판소리를 하면서 선생님도 직접 뵙게 되었어요. 판소리 공연갔다가
 선생님의 팬이기도 하고, 또 저를 다행히도 예뻐해주셔서 가끔 뵙고 지냈어요.  그때가 2002년~2003년 경 정도였고, 이외수선생님께서  당시 써주신 혹부리영감 이라는 창작판소리 사설을 써주셔서 공연을 하기도 했었어요. 그 이후 연락을 못 드리다가 이번 겨울에 한번
 뵈러 감성마을로 찾아갔었습니다.


3. 어떤 일을  하시나요?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프리랜서 소리꾼 입니다. ^^

 http://www.youtube.com/user/getblues <소리꾼의 유튜브>




4. 지금의 이 길(직업,삶의 방향)이 아닌 다른 길을 대한 고민에 대해서



'소리꾼'으로서 산다는 거 사람들은 흔히 좋아하는거 하니까  노래잘해서좋겠다, 부럽다,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는데요.  사실 전
그저 평범하게 살고싶습니다. 외로움을 많이 타고 마음이 좀 여린 편이라 가끔은 좀 힘들어해요. 또 요새는 오랜만에 다시 음악을 하다
보니 금전적으로 힘들어서 많이 지쳐있는 상태예요 삶의 고민은   이것도 '행복' 이 관건인데.좋은 엄마가 되고 좋은 아내가 되고싶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소소한 행복 참 쉽지만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들이 흔히 무대에서 박수받고 좋은 노래 하니까 행복하겠다 하지만 저는 소리꾼으로
성공도 좋지만,  한 여자로서 사랑받고 예쁜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사랑주고 행복한 가정 꾸리고 살고 싶어요.

소리꾼으로서는 그냥 하고싶은 공연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너무 치열하게 소리꾼으로서 성공을 하겠다는 것은  조금 접어둔것 같습니다.


<참조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63&aid=0000000049


5. 지금까지 삶 중에 최고의 순간은




4-5년만에  판소리 선생님 뵙게 된것입니다. 2001년정도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선생님이 계시는데요.  방황을 많이 해서  판소리도
관둔다고 하기도했고 많이 속상하게 해드렸거든요. 최근에..  다시 어렵게 연락드리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는 마지막  기회다.  다시는 안받아준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더 열심히 해서  사랑받는 제자가 되고싶고요.
판소리 할때만큼은  제대로 하고싶어요. 몇년만에 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선생님 뵐때마다
설레이고 긴장됩니다.  평생 공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죠!

<참조링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88



6. 고민



음악을 하다보니  음악을 해서 행복한가?  왜 음악을 하는 거지? 고민에 심각하게 빠지게되었고, 2년정도 아예 공연도 안하고 노래도 아예 안했었어요. 그때 혼자서 굳게 다짐했어요.  처음 판소리를 배웠을 때 처럼  정말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다시 하겠다.. 사실 참 무식하게 용기있게 쉬었고, 그마음이 생겨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새 드는 생각이있습니다. 행복하게 음악하자! 음악하면서 행복하자!  음악을 잘한다고 행복한것 같지는 않고요. 욕심도 많이
버리게 된것 같고요. 한예종이라는 대단한 학교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사실 눈도 높아졌고 욕심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건 버리게
됬습니다.  그것보단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어보는거  사람들이 듣지 않는 노래는 죽는 음악 사람들이 듣지 않는 음악은 죽은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좋아하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싶어요

특히 락음악을 워낙 좋아하다보니 락음악을 해보고싶어요. 제 몸엔 락커의 피가 흘러요. 정말 제 장기이고  판소리가 제.. 장점이라 하는것도 있어요. 판소리도 좋은음악이죠  하지만,판소리와 락 중에 아무것도 신경안쓰고 딱 한가지 고르라고 하면, 락음악 밴드음악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전통 판소리 공연보다도 퓨전국악 활동을 많이 해왔어요. 대중들과 소통하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요.

성격도 조금 반항적이고 문제를 볼때도 약간 삐딱하고 판소리 쪽에서도 비주류 적인  락커의 피가 흐르는듯  제 음악의 고향은 판소리가
아니라 락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거예요. 사실 판소리도 락과 비슷한 부분이 많죠 발성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판소리 태생 자체도,
 그렇고 뭐 여러가지로..

얼마전에 산울림 김창완밴드 공연을 길상사에서 본적이 있어요.
1시간 넘게 사람들이 그분의 음악을 듣고 있더라고요.  1시간 동안 음악을 들었던  원동력이 뭔지 아세요? 판소리를 1시간넘게 들을수
있을까요?  못들어요. 왜냐면 모르니까요. 김창완 노래는 아는 노래가 있고  그 노래에 얽힌 본인의 추억이 있기떄문에 1시간 동안 비를
맞으면서 들을 수 있었던거예요.  저는 전통 판소리만 고집하기보다는 그렇게 사람들이 따라부르고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참고기사>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315060


8.고마운 사람 미워했던 사람 화해하고 사람은

가족들  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마음은 안그런데 자꾸 잘 안되네요.  나이도 있고 이제는 제가 돈도 좀 벌고 부모님께 의지가
되어드려야하는데... 아직도 나이값못하고 방황하고 그러는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9.그럼 마지막으로 당신이 바라는 세상은 ^^
 
요새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도 사실 정말 정말 살기 싫을때 많고  자살도 ..참 많이 생각해봤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함께 잘살길 바래요

다들 행복하게 사는 세상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각자의 바라는 모습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다들 행복하길 바래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

김정은님의 또다른 인터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61130191447&section=04


2011년 8월 20일 토요일

유진박 부활콘서트

스스로 구원하라.  
기사입력 2011-08-14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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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15일 월요일

5.18 미래는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 ?

새로운 5.18을 위하여
기사입력 2012-11-27 10:57 | 최종수정 2012-11-27 19

 


 

5.18이 30년이 흘렀다. 그 쯤해서 5.18 관련 영화도 상업적으로 흥행 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여전히 5.18은 남겨진 사람들이 아픔이고 우리 역사에 있어서 매우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5.18 30년이 지난 지금 5.18은 어떻게 변해야 하고 어떻게 정리 되어야 할까 ?
5.18 행사에 [경축] 이라는 말을 써서 논란이 된 적이 있고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아서 또 한번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논란은 이제 끝을 맺고 순수한 5.18로 다시 되돌아 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구 전남도청 이전 문제 때문에 5.18 단체들은 반으로 나뉘어 이전투구를 했으며 그 논란 속에서 5.18의 의미는 훼손 되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5.18을 들먹거리며 한표를 구걸 했으며 5.18 단체들도 정치인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며
스스로 5.18 정신을 훼손하는 사례도 있었다.

우리나라 처럼 최근 50년 동안 민주화 운동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4.19로 시작해서 6.10항쟁 까지 모두 국민들의 힘으로
시작되서 민주화를 성숙시켰다.

하지만 그 모든 사안들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야 하고 모든 영역에서 국가보조금으로 진행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독재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 민주화가 성숙된 사회이고 국가다.

그 만큼 5.18도 순수히 제 자리를 찾아가  우리 역사 속에 한 페이지로 남아야 할 것이다. 5.18에 꼭 대통령이 와야 할 이유는 없으며
5.18이 국가적인 기념일이 아닌 광주에서 진행된 순수한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서 광주사람들 오래 동안 남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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